두 번째 봄
츠비
04, Jan.
1.
- 요한, 너는 너무 쟤한테 잘해줘.
- ....
- 가망 없는 사람한테 헛된 친절은 독이야. 쟤 마음 알면서도 그러는거면, 너도 참 나쁜 사람이고.
내가 모를 것 같냐 대꾸하는 대신, 요한은 들고 있던 장초를 발치에 떨어트리고, 이내 비벼 껐다. 요한과 형준은, 제국 사관학교 내 유명한 한 쌍이었다. 형준은 곧 죽어도 둘이 사귀는 사이라 떠들고 다녔지만, 그건 형준의 의견이자 바람이었다. 생도 대부분은 김요한을 죽어라 따라다니는 송형준과, 그런 형준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착한 요한이라 둘의 관계를 정의내린지 오래였다. 고향에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어 그렇다 했다던가, 요한은 의외로 어린 것들에게 물렀다. 사격 연습을 할 때나, 실전 훈련을 빙자한 소규모 전투에 출전할 때에는 그렇게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형준이 떼를 쓰거나 뭘 하자고 졸졸 따라다니면 게를 잘 거절 못해 손해를 봤다. 누군가는 요한이 의외로 다정하다 칭찬했고, 누군가는 요한이 의외로 반푼이라 폄훼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형준의 마음을 살살 녹인 요한의 처세가 영리하다 평가했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형준은 제국 수도방위군 대장의 아들이었다. 그런 사실 만으로도 형준은 사관학교 내 작은 사회에서 황태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본래는 성격도 모났고 성적도 나빴고 손발도 느렸다. 입학 자체도 대놓고 낙하산을 타고 들어왔지만, 손가락질조차 형준의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뒷배가 너무 무서웠으니까. 송형준 자체는 별거 없는 깡촌 꼬맹이 같아도 그 아비의 위세가 너무 대단했으니까. 비록 신원이 불분명한 어미의 배에서 태어났고, 심지어 그 어미도 애저녁에 죽고 없다고는 하지만. 형준은 충분히 많은 특권과 혜택을 누리며 생도 생활을 영위했다.
친구는 없지만 아첨하는 부하들은 무궁했다. 형준이 해야 할 일들을 대신 해주며 신하를 자처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늘 형준의 근처를 싸고돌았다. 하여 외톨이인줄도 모르고 그렇게 혼자 콧대 높아 잘 나대고 살던 차에, 타 지역 상급사관학교 출신의 요한이 전출을 왔다. 마찬가지로 엘리트 코스만 딱딱 밟아 올 법한 고급진 외모에, 같은 금수저라도 형준과 차원이 다르게 친절하고 수더분한 성격이라 어디 있어도 태가 났다. 하여 형준과 달리 요한은 인기가 많았다. 여 생도는 물론이고, 동기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요한을 좋아했다. 모나고 어린애 같은 성격으로 타인의 빈축을 샀던 형준마저도, 요한을 좋아했다.
그게 문제였다.
2.
형준이 바라보는 요한은 늘 겨울이었다. 그 안에 차고 서늘한 광야를 숨기고, 보드라운 눈송이인 양 시리게 웃던 요한을, 형준은 몹시 동경했다. 둘의 사이를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형준과 요한은 여타의 연인들처럼 진짜 사랑을 했다. 남 몰래 입도 맞춰 봤고, -배도 맞추려다 딱밤을 얻어맞긴 했지만,- 사랑의 비호아래 할 수 있는 거진 모든 것들을 요한과 함께 했다. 길지 않은 형준의 인생에, 맵고 짜고, 시지만 달디 단 모든 경험이 요한과 함께였다. 그 기억들이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 그 무엇도 사랑의 이름을 빌릴 수 없으리라.
형준은 진심으로 요한을 믿었다. 그가 왜 좋으냐 아무도 형준에게 질문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물어준다면 대꾸할 스크립트가 지구를 한 바퀴 감고도 남을 만큼. 그렇게 형준은 요한을 사사건건 좋아했다. 나름의 이유는 죄다 허섭했다. 지저분한 비가 내리던 날에, 손 모아 작은 우산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하루 종일 꿀꿀하고 속상했던 날에, 형준의 뚱한 표정을 보고 해사하게 웃어주었으니까. 언제 어디서든 형준보다 늘 반 보 앞서 걸어 주었으니까. 가끔 그 예쁜 눈망울 안에, 그 버석한 시선의 끝에, 형준 하나만 살풋 올리고 빤히 바라봐 주었으니까.
그런 모든 하잘 것 없는 사유가 모여 요한을 좋아하는 이유가 됐다. 제게서 기회를 찾지 않는 무심한 눈에 온 마음이 다 녹았다. 제게 조금도 관심 없음에도 차갑게 내치지 않는 무심한 다정함에 견딜 수 없었다. 형준의 전신 위에 그늘진 그 대단한 아비를 의식하지 않는 여유도 좋았다. 김요한은 송형준을, 김요한만은 송형준을, 송형준 그 자체로 보았다. 하여 그렇게 요한은, 형준에게 뭔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봄이 지나 여름이 되듯이, 봉우리가 터져 꽃이 되듯이, 동경 위에 스미는 애정은 당연한 순리였다.
요한을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준은 요한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아니, 요한에게 고백을 종용했다. 나를 만나라고, 나를 좋아하라고, 콧대 높게 강요한 사랑의 결말은 가혹한 무시였다. 좋아, 싫어, 그래, 아니. 가 아닌. 완벽한 무시. 그저 한 번 웃고 형준을 넘겨버린 요한의 처세에 아닌 척 내심 상처 입었다. 아부와 비아냥은 잘 알았지만, 진심을 맡긴 거절과 외면에는 내성이 없어서, 형준은 며칠 밤을 뚝뚝 우느라 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여 생도에게 피식 웃어주는 요한을 보고 나름의 각성을 했다. 몇 번 더 거절당하더라도, 요한이 저를 끔찍하다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이, 형준은 요한이 가지고 싶었다. 그 결심 이후에는 지리한 고백의 나날이 이어졌다. 나란히 행군을 하다가도 문득, 요한에게 제 마음을 줄줄 털어놓았다.
저를 좋아하라 강요하는 대신,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송형준이 김요한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합당한 진리에 대해서. 되도 않는 이유들을 손가락 하나하나 꼽아가며 요한을 구슬렸다. 지구가 천천히 자전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자꾸만 형준은 요한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개무시로 일관하던 요한이 차츰차츰 형준의 헛소리에 피식 웃게 되었다. 시선을 피하고, 딴청을 피며 자리를 뜨던 요한이, 어느 계절부터는 대충 꿰어 입은 형준의 반팔티 위에 툭, 제 져지를 올리곤 했다. 너 참 시끄럽다. 그러다 감기 걸려. 송형준, 어디가, 밥은 먹었어? ...그렇게 아주 조금씩 스며서, 마침내 요한은 형준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하여 사관학교 교정의 나무가 두 번쯤 더 옷을 갈아입을 때에.
- 진짜 좋아한다고.
- ....
- 하라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그러니까,
- ...
- 나 좀 사랑해주라..
몇 백 번을 긁어내도 또 다시 쓰라린 몇 백 번째의 고백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건지 짜증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끄덕임은 긍정의 표시였다. 그러며 요한은 작게 중얼거렸다.
- 호칭부터 제대로 하자. 준아, 내가 형이잖아
그리고는, 예의 그 무심한 얼굴이, 작게 웃기도 했다. 그게 너무 기뻐서, 그대로 돌진해 요한의 목을 껴안고, 깜짝 놀라 굳은 사람의 면전에 키스를 퍼부으며. 형준은 결국 울었다. 제멋대로 짝사랑의 종지부를 오늘 찍었다 자만하며.
3.
요한이 기억하는 형준은 늘 겨울이었다. 그 안에 크고 황폐한 황야를 숨기고, 잘도 아닌 체 하며 뻗대던 형준을, 요한은 조금 동정했다. 그 아이는 늘 봄이고 싶어 했으니까. 아니 화려한 여름에 어울리고 싶어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제 아비처럼 대단한 군인이 되고 싶어 했지만, 그 몸은 남들에 비해 턱없이 왜소하고 작았고, 싫은 소리만 툭툭 하며 얄밉게 구는 체 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잘 감추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시선이 갔다. 무시하면 그만이고 외면하면 해결 될 애정을 적시에 끊어내지 못해 질질 끌어온 것에는 요한의 책임도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여동생마냥 불쌍해서라고,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하자는 대로 이끌리고 휘둘리다보니 손도 얽히고, 혀도 얽혀서. 새빨간 얼굴로 도둑키스를 하는 형준이 내심 웃겨서. 그렇게 같잖은 연애에 계절이 두 바퀴를 훌쩍 돌았다.
- 이번에 임관하면 수도본부 떠난다며,
옥상 난간 끝에 나란히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던 동기 하나가 요한에게 툭 말을 꺼냈다. 살갑고 다정한 요한의 이면에 담긴, 차갑고 무심한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친우였다. 그는 조금 께름칙한 표정으로, 건물 아래 저 멀리서 요한에게 손을 붕붕 흔들며 기뻐하는 형준과, 담배를 무는 요한을 번갈아 본다. 그걸 어떻게 여태까지 숨겼대? 송형준은 모르지? 너 다음 주면 여기 떠나는 거.
- 굳이 말해서 뭐해.
요한의 손이 천천히 제 주머니를 뒤진다. 단박에 잡혀야 할 지포라이터가 이번에도 부재중이다. 제가 담배 피는 것을 싫어하는 형준이 매양 라이터를 숨겨버리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실망한 양 눈썹을 축 늘어트리자, 옆에 서 있던 동기가 제 라이터를 요한에게 건네주었다. 달깍, 파란 불이 금방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진다.
- 너, 말하면 쟤가 너 귀찮게 할 거 같아서 숨기는 거지?
- ...
대꾸하는 대신 요한이 느른하게 연기를 뿜었다. 아니면 설마 송형준 상처 받을까봐 말 못하고 있는 거냐? 옆에서 내민 질문에 큭, 웃음이 먼저 터진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저 아래에서, 형준이 요한의 입에 물린 담배를 발견하고 방방 뛰며 화를 내는 게 보였다. 떠들어봐야 건물 꼭대기에 기댄 요한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투정이다.
- 요한, 너는 너무 쟤한테 잘해줘.
- ....
- 가망 없는 사람한테 헛된 친절은 독이야. 쟤 마음 알면서도 그러는거면, 너도 참 나쁜 사람이고.
4.
[ 준아, 할 말 있어. 일과 후에 잠깐 볼래? - 요한 ]
보고 싶으면 일과 후가 아니라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부러 이렇게 문자를 남긴 것이 제법 불길했다. 연락은 열에 열은 형준이 먼저였다. 보고 싶어. 좋아해. 사랑해. 형준의 손끝에서 촉발한 수많은 감정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오지 않을 답장을 향해 나래를 폈다. 형준은 요한이 제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귀는 이 년 동안 부러 요한의 폰을 확인한 적도 없었다. 정말로 제 이름대신 열한자리 번호가 보이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서. 헌데, 웬일로 형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그것도, 귀하디귀한 만나자는 요청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저는 불안한지. 형준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폰만 붙들고 있는 사이, 차츰 흐려지던 대화창은 이내 거멓게 풀이 죽었다.
- 오늘 헤어스타일이 엉망인데..
형준이 괜히 투덜거리며 거울 앞에 섰다. 꾸밀 필요가 없는 관사 내에서 형준은 늘 똑같은 고수머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더, 앞머리도 풀이 죽은 것 같고, 뒷머리는 바짝 눌린 것 같다. 늘상 똑같이 생기 없는 얼굴에 우는 사람처럼 내려간 입꼬리도 썩 맘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요한이 저를 먼저 찾은 기념비적인 날에, 형준은 내심 준비해두었던 편지를 바지 뒤춤에 꽂고 용수철마냥 빗어도 빗어도 제자리인 제 머리를 하염없이 매만졌다. 그래도 잘 보이고 싶어서. 제가 사랑하는, 저의 오랜 연인에게.
5.
그러니까, 아무리 빗질을 해도 엉망이었던 헤어스타일 탓이다.
- 요한아, 싫어.
꼬질꼬질하고 핏기 없는 얼굴에, 오늘 마침 똑 떨어진 향수 탓이다.
- 나는 절대 너랑 못 헤어져. 아니 안 헤어질거야.
요한이 대뜸 헤어지자 말한 이유는, 제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해서, 오늘따라 차려 입을 옷도 없어서, 제가 딱 마침 오늘 너무 못나서.. 어제 요한을 만났다면 달랐을 텐데, 어제 요한과 밤을 보냈다면 오늘 헤어지자 하지 않았을 텐데. 다 그런 탓이다. 절대, 형의 마음이 식었을 리 없다. 애초에 그 마음은 달아오른 적도 없지 않느냐고? 아니, 그럴 리 없다. 그저 오늘 운이 나쁘기 때문에, 오늘 형의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 ...송형준,
- 요한아. 나는 너랑... 응? 아니.. 나는....
형준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당겨 웃는다. 풀죽은 입꼬리가 못났음을 아까 미리 확인한 까닭이다. 하여 웃으면, 요한이 꽤나 좋아했던 그 예쁜 웃음으로 요한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요한은 제가 뱉은 성의 없는 이별을 도로 주워 삼킬지 모를 일이다.
-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어.
- ...아니야, 요한아 아니야...
-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듯이, 우리 관계도 언제고 시들 수 있고.
함께 두 해의 계절을 무사히 보냈으면서, 요한은 새삼스레 꽃이 지는 가을을 운운한다. 요한처럼 멋있게 끝도 시작도 논할 수 없는, 형준은 바보라서. 요한의 에두른 거절에 발만 동동 구르다,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쓱 눌러 닦는다. 요한은 제가 우는 것을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는 어린애라는 듯 작게 한숨을 쉬고, 체념한 듯 저를 바라보는 요한은, 실은 형준이 우는 것을 귀찮아 하니까.
- 요한아,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랬어.
- ...
- 내가 꼭 두 번째 봄을 피워 보일게.
- ...
- 내가 더 노력해서, 응? 꽃을 보여줄게. 그러니까-..
형준이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그렇게 형준은 허물어지는 낙엽조차 꽃이라 믿으며 요한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 내 마음이 이렇게 뜨거운데 왜 우리 사랑에 다른 계절이 필요해. 내 마음은 늘 미어지는 여름과 설레는 봄 사이에 있을 뿐인데, 왜 너는 그렇게 섣불리 끝을 종용해. 형준의 입술이 울기 직전의 어린애마냥 움찔거린다. 그리고 요한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뚝 뚝 흘리는 형준을 무심히 내려 본다. 아니, 무심의 가면에 숨어, 요한은 자꾸만 형준의 진심을 피하려 든다. 한심해 해야 하는데, 형준의 우는 얼굴은 꽃처럼 달다. 미미하게 떨리는 입술의 감촉을 요한도 안다. 남몰래 폭 안아주었던 마른 어깨의 양감을 요한도 안다. 바보 같은 꼬맹이. 제멋대로에 어리숙했던 치기어린 연인. 나름 성의를 다해 사랑해주려 노력했던, 그러나 결코 요한의 끝이 될 수 없는 그저 예쁜 동생.
- 낙엽이 왜 꽃이야.
- ...
- 벌겋게 바래는 허물이지.
하여 형준아, 우리는 이제 다시 볼 일이 없을거야.
적어도 웃는 낯으로는.
5.
요한은 정해진 시일에 미련 없이 떠났고, 김요한을 사랑했던 송형준만 요한이 없는 관사에 우스갯거리로 남았다. 김요한과 사랑하는 사이라 이년을 젠체 했는데, 정작 요한이 떠난다는 사실도 제일 늦게 알았다고, 수군거리는 구경꾼들은 오도카니 남은 형준을 우스워했다. 제 아비와 달리 바보 같은 짓만 일삼는 애물단지 황태자는, 그렇게 동물원 원숭이마냥 모두의 빈축을 샀다. 애먼 사람 귀찮게 나대더니 결국 버림받고 남겨졌다고. 그런 수많은 비난과 이죽임의 곁에서, 형준은. 들리지 않는 체, 보이지 않는 체를 했다. 그래도 한 때는 다정했던 요한이, 그렇게 냉정하게 떠나고 나서도. 형준은 요한을 제 마음에서 조금도 덜지 않았다. 약속한 바 있었다. 요한과 손가락 마주 걸고 한 것은 아니고, 제 홀로 떠드는 다짐과도 같은 약속이었으나. 형준은 요한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 그럼 다음에, 진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려서,
- ...
- 그 때까지 내 마음 변함없으면,
형도 그 때는 나 믿는거야.
형준이 제 입으로 그리 말했다. 요한이 듣고 있음을 알기에, 돌아선 그 등 뒤에 대고. 형준이 손모아 외쳤었다. 대꾸는 듣지 못했다. 대꾸할 마음조차 없었을지 모르지만, 요한은 그렇게 형준을 떠나고, 수도를 떠나고. 그리고는, 발령 받았다던 타지에도 가지 않았다.
갓 장교직에 오른 김요한 소위는,
그렇게 한 낯의 아지랑이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6.
반란군과 제국군의 줄다리기는 언제나 제국군의 승리였다. 점조직으로 산재해있는 반란군을 뿌리 뽑기는 지극히 어려웠으나, 일단 터진 난전은 늘 제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을 맺었다. 제국에 부족한 것은 반란군을 토벌할 명분이었고, 반란군에 부족한 것은 제국과 맞서는데 필요한 정보였다. 허나 군의 정보망은 쉽사리 뚫리는 법이 없었고, 제국은 명분이 없이도 수많은 양민을 반란군 처단의 이름으로 학살하곤 했다.
그런 일방적인 우위에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저께 처음으로 반란군이 게릴라전에서 제국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숨겨두었던 제국군의 보급로가 일시에 끊기고, 줏대 없이 봉기할 줄만 알던 반란군들이 이번엔 제법 크게 연대를 해 제국군을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군 무기를 반출하던 선박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겨 힘의 균형이 가파르게 흔들렸다. 제국의 정보가 새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알 만큼 확실히, 반란군이 정보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든 변화의 물꼬에, 자꾸만 누군가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김요한.
그가 이전에 몸담았다던 상급사관학교에서 전갈이 왔다. 요한의 고향이 수도가 아니었느냐는 늦은 확인이었다. 수도의 사관학교에서는 요한의 출신지로 다른 지역을 짚었다. 또 다시 통신이 급하게 오갔다. 요한이 제 고향이라 말했던 곳에서는 요한이 누군지도 몰랐다. 요한이 가져온 서류는 교묘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그의 신원 증명을 했던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지 오래였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어느 하나, 누구 하나, 요한의 고향을, 요한의 가족을, 요한의 뿌리를 알지 못했다.
- 모든 게 사기였네. 소름끼치는 사기.
요한을 좋아했던,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믿었던 동기, 후배, 선배. 그리고 모두가 그를 비난했다. 선한 웃음과 공존했던 서늘한 무심함이 뒤늦게 사람들을 치 떨리게 했다. 전부 거짓이었다. 제국의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프락치에 지나지 않았던 자에게 모두가 너무도 큰 신뢰를 줬다. 누구 탓일까. 누구의 잘못이 가장 컸을까. 누가 제국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을까. 하나하나 꼽아가며 비난의 대상을 찾던 손가락들은 결국 만년 반푼이 고수머리 생도를 지목했다. 송형준, 너는 김요한이랑 사귀었다며. 네 말마따나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며. 그렇게 다들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는데, 저 혼자 좋다고 날뛰더니. 결국 김요한한테 속은 사람은 송형준 바로 너네. 그렇다면 네가, 제국군의 비밀도, 누설하지 말아야 할 제 아비의 신변도. 모조리 말했겠네. 반란군에게 제국의 비밀을 고스란히 고해바친 머저리 병신새끼는,
역시 너 밖에 없겠네
7.
형준이 요한에게 제 마음을 주었듯, 요한이 형준에게 해준 모든 사소한 말들도 형준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요한이 형준에게 직접 말해주었던 그의 고향을 기억했다. 제국이 알고 있는 요한의 본적이 그와 다름도 알고 있었다. 그런 공적인 것들 뿐 만 아니라, 형준은 요한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았다.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색깔, 즐겨 마시는 음료, 형준 몰래 늘 서랍 구석에 처박아두고 가끔 꺼내 피우던 쓰고 독한 담배의 향까지. 형준은 요한이 흘린 모든 '순간'을 제 온몸으로 담아 안았다. 요한이 없는 지금, 사소한 기억이 죄다 소중했다. 하여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형준은 제가 쥔 요한의 모든 사소함을 단 한 조각도 내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던 제 아비가 직접 찾아와 저를 힐난하고. 제가 누리던 모든 특혜와 권리를 모두 빼앗기고. 생전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고문에 끅끅대며 울기도 했다. 그렇게, 지하 감옥 독방에 갇힌 채 덜덜 떨리는 무릎을 껴안고 울 때까지.
형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요한이 보고 싶었다. 제가 못살게 굴어도, 아무리 떼를 쓰고 화를 내도, 귀엽다는 양 한번 웃고 제 볼을 쥐었다 놓는 그 다정한 무심함이 숨 막히게 그리워서.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주지 않는 독방에 가둬진 채로, 형준은 끝도 없이 요한을 그리고 또 그렸다. 창문 없는 방에 몇 번의 해가 떴다 지고, 요한과 나눴던 시답잖은 그 모든 순간들이 중첩된 환영으로 형준을 괴롭혔다. 시끄러웠다. 작은 방 안에 요한의 환영이 너무 많았다. 하고픈 말이 많아서, 나눈 순간은 언제나 적었으나 이제와 회상하기에 너무 많은 추억이 귀를 울렸다. 며칠을 먹지 못한 몸이, 상처 입은 머리가 그려내는 환각은. 빵도, 칼도 아닌 그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다.
8.
언젠가 자신이 형준에게 말했던 것처럼,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반란군의 전쟁 역시 종지부를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한이 가져온 정보는 처음 몇 주만 쓸모 있었다. 보급로는 또 다시 개편되었고, 무기는 또 다른 운송수단을 통해 공수되었다. 여전히 제국군은 명분 없이 국민을 학살하고, 그 위에 무성의하게 반란의 이름표를 달아 넘겼다. 성공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제는 반란의 끝을 볼 때였다. 마지막 총 공세는 가장 강력한 방위군이 지키고 있는 수도를 향해 이뤄져야 했다. 수도에 똬리를 틀고 앉은 수많은 병력과 그들이 지키고 있을 군의 통수권자를 처단해야 했다. 보급로나 차단하는 게릴라전으로는 끝끝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하여 골머리를 썩히던 차에, 믿을 수 없는 정보 하나가 살며시 반란군 수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 수도에 적을 두고 있던 제국군에게까지 총 동원령이 떨어졌대. 그래서 조만간 수도에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죄다 빠져나온다는 거야.
- 언제? 어디로 무슨 공격을 가는 건데?
- 그건 아직 몰라. 다만 확실한 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단 하루는 수도 방위가 느슨해질 거라는 거지. 우리는 그 기회를 잡으면 돼.
때는 아마도 정월 초하루 쯤. 시리고 무딘 겨울의 복판에, 하늘이 안배해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다만, 한 구석에서 불붙지 않은 장초를 멍하니 물고 있는 요한 혼자, 의심스러우리만치 적확한 기회를 곱씹어본다. 평생을 배신을 염두에 두고 산 인생 일지언정. 제가 의식하지 못하고 남긴 사소한 정보가 모든 계획을 흐트러뜨리는 멸망의 촉매가 될 수 있으니. 하여 제 지나온 나날을 천천히 회고하는 요한은, 자꾸만 어쩔 수 없이 저의 많은 시간을 나눠간 멍청한 어린 연인을 떠올린다. 총공세를 퍼부을, 이제는 확고한 적이 되어버린 적진의 복판에, 요한이 남겨두고 온 미련한 연인이다.
- 세상 누가 미숫가루를 따뜻하게 데워 먹어. 으.. 텁텁하고 느글느글 할 것 같아.
- 몰라서 하는 소리. 형아 고향은 추워서, 거기서는 다 이렇게 먹었어. 봉화산이라도 가야하는 밤에는 꼭 하나씩 챙겨간다고 했어. 산세가 워낙 험해서 고립되면 끝이거든
- 김요한 너 좀.. 노인네 같아.
- 형 대우나 좀 하면서 그런 소리 하면 좋겠는데.
회상의 끝이 미심쩍다. 그게 아니라도, 고향 핑계 삼아 반란군의 숨겨진 본거지를 언급한 기억은 한 둘이 아니다. 혹여라도 형준이 눈치 챈다면, 요한의 고향이, 실은 반란군의 본거지임을 형준이 깨닫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수도방위군까지 모조리 동원한다는 결전의 그 날, 비처럼 쏟아질 포탄을 막아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요한이 적을 둔 이곳이다. 어쩔 수 없이, 이는 명백한 요한의 실책이다. 하지만 요한은, 제 마음 속에 슬며시 떠오른 불안을 애써 모르는 척 한다. 설령 제국군에 의해 이 곳이 모조리 도륙나버린다 해도, 반란군은 그 하루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여기 남겨진 자들은 죽겠지만. 그 덕분에 수도로 향하는 반란군은 마지막 결전을 치룰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요한은 제게 배신당한 형준의 마음마저 끝끝내 이용하기로 했다. 아마 형준은 제가 미울 것이다. 속아서 분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만큼 더 크게 배신감을 느꼈을테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남김없이 상부에 고해바치더라도. 요한이 그런 형준의 울분까지 어찌 할 수는 없기에. 그저 진격할 미움을 그대로 받아주며 몰래 숨어 뒤를 칠 계획이었다. 그렇게, 둘의 계절에 끝내 봄은 올 수 없을 테지만.
9.
예상대로, 정월 초하루 흐린 밤중에, 제국의 육해공군 모두가 북진을 시작했다. 반란군이 가지고 있던 정보는 정확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새벽이 오기도 전에 수도는 텅 빌게 분명했다. 허나, 예측이 들어맞은 것은 제국의 행보뿐만이 아니었다. 요한의 예상대로, 북진을 시작한 제국군은 정확하게 반란군의 본거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요한 뿐 아니라, 기민한 몇 명의 간부들도 제국이 가진 정보를 가늠해볼 수 있을 만큼.
- 왜 모든 군대가 이쪽을 향해 오는 건데, 이거 우리 위치를 들킨 거지?
- 뭐야, 정보가 어떻게 새 나간거야. 이제 어쩌지.
- 어떡하긴. 본부를 버려야지. 당장 도망쳐, 그리고 오늘 밤 거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사력을 다 해.
- ...!
-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둘 중 한 세력은 괴멸 될거야
회의는 빠르게 이어지고, 쉬이 결론 났다. 반란의 수뇌부들은 야음을 틈타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소란을 일으켰다간 되레 제국군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할지 몰랐다. 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남겨진 마을 사람들은 그대로 타의적 인질이 되었다. 그 들은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기에, 이어질 도륙의 총칼은 철저히 전쟁과 무관한 양민에게만 내려질 예정이었다.
- 김요한, 간단하게 짐 꾸려서, 빨리 나와. 떠나자.
- ...
다급한 간부의 손짓에, 요한이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제 짐가방을 꺼내어 들었다. 가방은 제국군에서 다급하게 도망치던 날, 몇 안되는 짐을 우겨넣었던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딱히 더 챙길 것도, 뺄 것도 없는 터라 그대로 그 자리를 뜨려던 것을, 가방 앞주머니에서 툭 떨어진 쪽지 하나에 요한이 멈칫하고 섰다. 본 적 없는 편지건만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그려진 샛노란 종이가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 잠시만, 먼저 가.
다급한 표정의 간부 하나가 요한의 눈치를 보다 뛰쳐나갔다. 아직 바깥은 고요했다. 허나 폭풍전야의 적막. 빨리 도망쳐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데. 요한은 가만히 서서 조악하게 접은 쪽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쪽지는 크지 않았다. 안에 쓰인 문장 또한 길지 않았다. 조그만 손으로 제법 동글동글한 글씨를 쓰는 형준은, 몇 번이나 요한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전해 주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둘이 연인이던 시절에. 형준은 그렇게 지저귀는 말로도 못다 전한 제 넘치는 사랑을, 예쁜 글로 남겨 몇 번이고 요한에게 보내주었다.
예의 그 편지일거라 생각했다. 다급한 이 순간,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좋았을 아이의 진심이었다.
[ 요한이 형.
형 몫까지 내가 기다릴 테니까
꼭 나한테 돌아와.
사랑해요. ]
요한은 한참이나, 형준이 숨긴 작은 문장을 곱씹어 읽었다. 다음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린다 말했던 형준의 마음은 삿된 진심이었다. 몰라서, 그만 요한에게 깜박 속아버려서, 바보 같아서 요한을 기다린다 한 것이 아니었다. 형준은 요한이 떠날 것임을 알았다. 알고도 그리 애타게 요한을 잡고 싶어 했다. 허나 형준이 끝까지 쥐고 있었던 것은 요한의 화답이 아닌 제 자신의 너절한 순정이었을 뿐.
- ....병신 같은 게..
톡, 하고. 힘주어 쓴 사랑 위에 눈물이 번졌다. 요한은 형준에게 한 번도 제 진심을 보여준 적 없었는데, 형준은 어느새 다 알고 있었다. 그게 미안했다. 그 순정에 대한 대답으로 제국군 괴멸을 보답할 요한의 현실이, 돌아가 또 다시 그 때를 마주한다 하더라도 결국 또 형준을 배신할 제 마음이 미안했다. 또 다시 외면당하더라도, 그늘진 눈을 숨기고 해사하게 웃어줄 형준을 알기에.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매번 원하는 대로 해준 적 없어 미안하고, 결국 네가 있을 곳에 총칼을 들이미는 제 자신은, 정말로 무정한 연인이었다.
10.
요한은 끝끝내 거점을 떠나지 않았다. 그 고요한 혼돈의 도가니에서, 요한 혼자 오도카니 남아 거점을 지켰다. 형준이 싫어했던 예의 그 독한 담배를 문 채로. 요한은 멍하니 건물 옥상에 서서, 멀리 여명대신 밝아오는 공군 편대의 점멸등을 바라보았다. 이는 일종의 속죄였다. 반란군의 본거지를 들킨 것도 요한의 자만 때문이었고, 제국군의 함락 역시 요한의 배신 때문이니. 요한은 속죄하고 싶었다. 저를 믿은 반란군 간부나, 제국군 동료들이 아닌. 제 어린 연인 송형준에게.
- ...
반짝거리는 4기 편대의 뒤에, 수많은 전투기들이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명멸하는 죽음의 사자, 그 모든 진격을 앞에 두고, 요한은 아주 천천히 담배를 빨았다. 독한 연기를 품은 시린 한숨이 어두컴컴한 옥상 위에 낮게 흩뿌려졌다.
10,
9,
8,
7...
어쩌면 마지막의 순간, 요한의 곁에 남은 것은 회한 가득한 담배연기 뿐이다.
6, 5, 4....
3,
2,
키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귀가 먹을 것 같이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나의 소리가 끝나기 전에, 혹은 그 소리에 중첩되어 둘, 셋, 넷, 별보다 많은 비행기가 제 머리 위를 지나갈 동안. 요한은 눈을 꼭 감고 주먹을 꽉 쥔 채 죽음을 대비했다. 헌데, 요란한 소리만 수분이 넘게 이어지고, 각오했던 끝은 이내 오지 않았다.
- ....뭐지
요한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거운 폭탄을 가득 머금은 커다란 비행기들이, 요한의 머리 위를 지나 이내 반란군의 도시 위를 빠르게 스쳐간다. 장착된 폭탄을 그대로 실은 채. 모든 비행기들이 마을 상공을 떠났다.
- 봉화산은 우리 마을 너머에 있어. 마을에서도 꽤 멀어서 밤새 거길 지나려면 고생을 꽤 해야 하거든.
- 왜 그래야 해? 거기 사는 사람들한테 재워달라고 하면 되잖아
- 준아, 그 산에는 아무도 못 살아. 산세가 너무 험해서, 너 같은 멍청이는 물론이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살 걸..
낮게 편대를 이뤘던 전투기들은, 고문 끝에 알아내 하달 받은 정보 그대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봉화산을 향해 총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허나, 그 산은 죄다 깎아지른 절벽 뿐, 누구도 살지 않는 빈산이었다. 헐벗은 겨울나무 몇 그루도 겨우 뿌리를 붙이고 선,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산. 밝은 낮에 보았다면 알 수도 있었다. 그 안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걸. 허나 제국군은, 저들이 보고받은 대로, 실체도 없는 반란군의 본거지를 향해 저들의 모든 화력을 총 동원해 개미새끼하나 살아나올 수 없는 불바다를 만들었다. 실제 살아나올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산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 ......하..
멍하니 벌어진 요한의 입술 새, 필터 끝까지 타버린 담배가 툭 떨어졌다. 폭격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을에 남은 반란군의 잔당과 마을 주민들 모두가 깨어 달아날 수 있을 만큼, 길고 오랫동안 이어진 허튼 공세의 입회인은 오롯이 요한 하나 뿐 이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격렬한 폭발이 멍한 요한의 망막에 끝도 없는 잔상을 남긴다. 하나의 빛이 번지는 사이 다른 빛이 또 다시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 소름끼치게 애틋한 광경 속에서. 요한은 자꾸만 환영을 마주한다. 시끄러운 폭음 사이 지치지도 않고 들리는 환청은 결국 또 형준의 것이다. 그 슬픈 눈, 그 예쁜 미소와 함께.
- 요한아,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랬어.
- 내가 꼭 두 번째 봄을 피워 보일게.
황량한 산 위에 쏟아지는 격렬한 색채가,
귀를 에이는 시린 폭음이,
마치.
만개한 봄꽃 같다.